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한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 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손택의 현실 참여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대의 유명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기고,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같은 숱한 독설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 베트남 전쟁의 허위, 아메리카 드림의 실상을 폭로했던 것이다.
주류 대중매체는 이 일을 계기로 손택의 별명을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에서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나, 그 뒤로도 손택은 자신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라고 얘기하며 9/11 사건 직후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인 태도들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선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손택은 결코 논쟁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로베르 두아노는 1950년 ‘라이프’를 위해서 자신이 찍은 사진, 그러니까 젊은 남녀 한 쌍이 파리 시청 근처의 보도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 일종의 순간 포착이었다고 명확히 주장한 적이 결코 없었다. 먼 훗날 40여 년이 지난 뒤 일당을 받고 고용된 한쌍의 남녀가 두아노의 지휘 아래 입을 맞췄다는 두아노의 지휘 아래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이 사진이야말로 고이 간직해야 할 낭만적인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파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이 사진작가가 사랑과 죽음이 펼쳐지는 장소를 드나드는 스파이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사진에 찍힐 인물들이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방심 속에서” 사진작가에게 찍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제 아무리 사진은 무엇이다, 혹은 사진은 무엇이 될 수 있다, 라고 정교하게 말할지라도, 우리는 재빠른 사진작가가 이제 막 진행되고 있는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을 포착해 놓은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만족감을 결코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근처에 있던 사진작가가 적절한 순간에 셔터를 열어서 찍은 전쟁 사진만을 진정한 전쟁 사진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승전 장면을 담은 사진들도 모조리 적격 판정을 못 받을 것이다.
전쟁을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볼 때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 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일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에 실린 유명한 사진에 찍힌 사람, 부상을 입은채 목숨을 구걸해야만 할 운명에 처한 그 탈레반 병사에게도 아내와 자식, 부모와 형제 자매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아들이자 형제인 그 벼아가 살육되는 장면이 찍힌 저 세 장의 컬러 사진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그 사진들을 보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전 역사를 통해서 전쟁이 늘 이런 식으로만 여겨진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전쟁이 표준적인 상황이었으며 평화가 예외적인 것이었다.
‘일리아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절정 부분에서는 인간들이 전투 중에 어떻게 부상입고 살해되는지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이 늘 되풀이되곤 했다. 전쟁은 인간이 상습적으로 행하는 일, 그것 자체가 인간에게 가한 고통이 누적된 까닭에 결코 억제되지 못하는 그무엇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말이나 그림으로 전쟁을 재현하려면 예민하고 움츠려들지 않을 초연함이 필요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투 장면을 그릴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언급하면서, 예술가들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의 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언했듯이 부당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품게 될 감정이 연민이라면, 연민은 도덕적 판단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비록 비극적인 불행을 그린 드라마에서는 원래부터 공포와 연민이 쌍둥이일지는 모르나, 흔히 공포(무서움, 두려움)가 연민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는 한, 공포는 연민을 희석(산란)시키는 듯하다. 그러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가의 시선이라면 말 그대로 냉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들이 그린 전쟁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야 하며, 바로 그 끔찍한 Terribilità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는 것이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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